천주교 신자가 되고 싶어요
50주년 기념 성경 통독

설립 50주년 희년의 다짐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 말씀 안에서 길을 찾고 배우는 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해, 신년 1월 3일 주일부터 2021년 한 해 동안 52주간 매일 성경읽기가 시작됩니다.

주일에는 미사 20분전에 모두 함께, 평일에는 각자 개인적으로 성경통독표에 따라 성경읽기에 동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일미사 참례시 항상 성경을 지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성경통독표 인쇄물은 각 구역과 공소별로 배포해 드리며, 본당 홈페이지에서도 확인 및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50주년 기념미사 동영상


50주념 기념미사 간추린 본당 50주년 기념미사

50주념 기념미사 50년 회고 사진영상

 

프랑크푸르트 한인천주교회 설립 50주년 기도문

○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
한국 순교자들의 영광스러운 신앙의 유산을 가슴에 품고
이 땅 독일에 주님의 성전을 마련하여
신앙의 뿌리를 내리게 해 주신 지 50년이 되었나이다.

● 이민자의 고달픔과 삶의 절실함 속에서도
반세기 동안 모국어로 미사를 봉헌하고
한민족의 전통과 풍습을 지켜 가며
신실하고 순박한 마음으로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며 용서하는
신앙 공동체를 지켜 올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 이제, 저희 공동체가 걸어온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주님의 크신 사랑에 오롯이 응답하지 못한 허물을 반성하고
공동체 초창기 때의 열정과 사랑을 되새기며
“다시 일어나 아버지께로”(루카 15,20) 가고자 합니다.

● 저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어
일치된 마음으로 희년의 축제에 참여하는
은총의 시간을 허락하시고
이 축제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참 평화와 기쁨을 맛보게 하소서.

○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
저희의 삶을 온전히 맡겨 드리오니,
저희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해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교회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복음 선포에 대한 열정이 세상 끝날까지 타오르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 평화의 모후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한국의 모든 순교성인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축하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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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존경하는 프랑크푸르트한인천주교회 형제 자매 여러분

제21대 사목회장 김만영 베드로


본당설립 50주년을 맞이하여 그 누구보다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우리 공동체의 영적 성장과 화합을 위해 많은 노력과 정성을 아끼지 않으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 종신부제님들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아울러, 공동체 역사상 어려웠던 순간 순간에도 선한 목자 예수님의 음성을 놓치지 않고 오롯한 신앙의 길을 걸어오신 모든 형제, 자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특별히 프랑크푸르트 성전 이전과정에서 재원 마련을 위해 어려운 시대에 물심양면으로 함께 해 주신 1세대 형제자매님들의 헌신적인 공헌에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50년의 공동체 역사에서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어 주신 많은 분들이 있었기에, 이제는 바야흐로 청년층과 2세대까지 젊고 생동감 넘치는 공동체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1970년, 김춘호 베드로 신부님의 부임으로 시작된 우리 공동체는 오랜 세월 몇 곳으로 나누어 미사를 드려왔습니다. 세월이 흘러 설립 25주년을 몇 해 앞둔 1992년에 들어서 비로소 한곳으로 통합되어 미사를 드리는 마인츠 한인천주교회 공동체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25년이라는 세월이 더 흐른 2020년 오늘 우리 모두는 기쁜 마음으로 프랑크푸르트 한인천주교회의 이름으로 뜻 깊은 공동체 설립 50주년을 기념합니다. 하느님께서 미리 계획하시고 이끌어 주신 공동체의 지난 50년. 돌아보면 공동체가 걸어온 발자국마다 하느님의 은총이 깊게 새겨져 있음에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독일에 정착하게 된 시점이나 사연,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달라도, 한사람 한사람을 프랑크푸르트 한인천주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울타리 안으로 불러 주신 분은 바로 우리가 자비로우신 아버지라고 믿고 고백하는 하느님 한 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믿음안에 한 형제요, 자매이며 식구입니다.

„일어나 아버지께로“(루카 15,20) 본당설립 50주년 희년을 맞이하여 선택된 이 성경구절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참회의 마음으로 뉘우치며, 자비로우신 아버지를 기억하여 그 분께로 돌아서는 둘째 아들의 고백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것을 끊임없이 요구만 했던 둘째 아들의 모습이 혹시 우리 자신에게도 숨어 있는지 모릅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이제 우리도 일어나서 다시 아버지께로 향해야 하겠습니다.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 그것은 동시에 아버지의 마음에 드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발걸음으로 인해 그 분께서도 크게 기뻐 하시리라 믿습니다.

본당설립 50주년. 예수님 부활부터 성령강림을 통해 제자들이 더욱 용기 있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 오순절까지의 날수가 오십이었 듯, 오십이라는 숫자는 충만함과 함께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출발의 의미를 담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우리가 기념하는 본당설립 50주년의 의미는 그 어느때보다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람도 오십이 되면 지천명, 즉 하늘의 뜻을 헤아려 알게 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 공동체 역시 때로는 함께, 또 때로는 세대를 이어 겪고 체험하여 누적된 50년이라는 세월을 뒤로 하고, 이제는 50주년 희년을 맞이하여 공동체를 향한 하느님의 뜻을 깨달아 희망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어야 하겠습니다.

새로운 50년을 향한 우리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으며, 본당 주보성인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삶을 가슴에 새깁니다. 우리가 본당설립 50주년을 희년으로 선포하고 기념하는 이 때에, 교회는 일찍이 순교에 이르기까지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우리 가운데 살아있는 김대건 성인의 탄생 200주년 희년을 함께 기념합니다. 우리 공동체에게는 더없이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또한 하느님의 섭리라 고백하며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둘째 아들이 회심하고 하느님께로 돌아서고, 김대건 신부님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들어, 먼 길을 마다 않고 그 소명에 응답하였듯이, 희년을 지내는 우리도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로 변화되기를 희망합니다. 이를 위해 첫째, 성경 말씀을 통해 공동체에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둘째, 그리스도 성체 성혈의 신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며, 셋째, 늘 우리 공동체와 함께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평신도 사도직에 함께 임하는 성숙한 신앙 공동체가 되도록 합시다.

공동체 설립 50주년을 기뻐하며, 모든 분들께 하느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고맙습니다.

2020년 9월

 



50-jähriges Jubiläum der Koreanischen Katholischen Gemeinde


Sehr geehrter Herr Pfarrer Chung, lieber Mitbruder, liebe Schwestern und Brüder im Glauben,

zum 50-jährigen Bestehen der Koreanischen Katholischen Gemeinde gratuliere ich Ihnen auch im Namen der Dezernentin Pastorale Dienste, Frau Prof. Dr. Hildegard Wustmans, sehr herzlich.

Ich bin mit Ihnen verbunden und versichere Ihnen mein Gebet, wenn Sie am 20. September 2020 in einem festlichen Gottesdienst dieses Ereignis feiern. Per Live-Stream werden auch die Gläubigen der Koreanischen Katholischen Gemeinde teilhaben, die weit verstreut in den Diözesen Limburg, Frei- burg, Fulda, Mainz, Rottenburg-Stuttgart, Speyer und Trier woh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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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h und dankbar können Sie auf die lange und ereignisreiche Geschichte der koreanischen Katholi- kinnen und Katholiken in Deutschland blicken. Bereits in den 60er Jahren kamen Krankenschwestern und Bergbauarbeiter aus Ihrem Heimatland, um hier einen wichtigen Dienst in den Krankenhäusern, Pflegeeinrichtungen sowie im Bergbau zu leisten. Ich finde es bemerkenswert, dass sich von Beginn an die koreanischen Frauen und Männer in Eigeninitiative versammelten, um zu beten, sich über den Glauben auszutauschen und gemeinsame Aktivitäten zu planen. Das hat sich segensreich ausge- wirkt. Der ehemalige Bischof von Mainz, Hermann Kardinal Volk, taufte in der Osternacht 1970 29 Koreaner im Mainzer Dom. Dieses Ereignis hat eine große Bedeutung für das Entstehen der Ge- meinde. Nach und nach bildeten sich durch den Einsatz von Priestern und Ordensschwestern aus Korea festere Strukturen und eine verlässliche Seelsorge heraus. Seit dem 1. Januar 2006 hat die Koreanische Gemeinde eine Beheimatung in Frankfurt, St. Albert, und damit im Bistum Limburg ge- funden. Sie steht in Verbindung mit den Verantwortlichen dieses Kirchortes und der neu errichteten Pfarrei St. Franziskus sowie der Stadtkirche Frankfurt. Als Gemeinde von Katholiken anderer Mutter- sprache gehört sie zum Bischöflichen Ordinariat Limburg.

Der Tag, an dem Sie Ihr Jubiläum begehen, verbindet sich mit dem Gedenktag des hl. Andreas Kim Taegon, dem ersten koreanischen Priester, der aus seinem Glauben gelebt und für ihn gestorben ist. Das Lebenszeugnis dieses Märtyrers, seine Treue zu Jesus Christus machen Mut und spornen an. Eine Statue des hl. Andreas Kim befindet sich vor dem Eingang von St. Albert. Ich sehe darin eine Bot- schaft: Der Heilige begrüßt die Gläubigen, die die Kirche betreten und erinnert sie an die Tradition, in der sie stehen. Und wenn Gottesdienstteilnehmer die Kirche wieder verlassen, bekräftigt er den Sendungsauftrag, den jeder Getaufte zur Entfaltung bringen soll,

Es ist wunderbar, dass diese Mission in Ihrer Gemeinde einen hohen Stellenwert hat. Es freut mich zum Beispiel, dass seit Jahren eine größere Gruppe erwachsener Taufbewerberinnen und Taufbewer- ber aus der Koreanischen Katholischen Gemeinde an der Zulassungsfeier im Limburger Dom teil- nimmt. Was diese Katechumenen zum Ausdruck bringen, ist selbst wieder ein Zeugnis, das andere Inspiriert. Für das Glaubenszeugnis Ihrer Gemeinde, das von zahlreichen Personen, Gruppen und Ini- tiativen gelebt wird, danke ich Ihnen von Herzen.

Auf die Fürsprache der seligen Jungfrau und Gottesmutter Maria und des hl. Andreas Kim Taegon

möge Sie unser gütiger Gott segnen und auf Ihren Wegen im Bistum Limburg und darüber hinaus leiten und begleiten.


24.August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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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 Georg Bätzing Bischof von Limburg

 

친애하는 정 신부님, 부제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50주년 기념일을 맞이한 한인 공동체에 교구 사목국 부스트만스 교수님과 저의 축하 인사를 전합니다. 저는 9월 20일 50주년 기념미사에 여러분과 기도 안에서 함께 합니다. 또한 림부르크, 풀다, 마인츠, 로텐부르크-슈투트가르트, 프라이부르크, 트리어, 슈파이어 교구의 많은 한국 신자분들도 라이브 스트리밍을 통해 함께 합니다.

여러분은 길고 많은 일이 있던 독일에서의 50년 역사를 돌아보며 참으로 기뻐하고 감사할 수 있으실 겁니다. 60년대 때부터 한국에서 간호사와 광부로 독일로 파견 나와 독일 사회에서 - 병원, 양로원과 광산에서 - 중요한 일을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한국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기도하고, 신앙을 나누고 같이 활동을 계획하였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이것은 큰 축복이었습니다.

1970년 부활성야 미사 중 마인츠 주교좌 성당에서 한국 성인 29명이 당시 주교님이셨던 헤르만 볼크 추기경님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일은 한인 공동체 형성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통해 공동체는 점점 틀을 갖추어가고 안정적인 신앙생활이 가능해졌습니다.

2006년 1월1일부터 한인 공동체는 프랑크푸르트 알버트 성당으로, 즉 림부르크 교구로 이전해왔습니다. 여러분들은 현지 성당 관계자들, 현지 본당인 프란치스쿠스 관계자들과 프랑크푸르트 가톨릭 교회 관계자들과 교류를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인공동체는 다른 모국어를 사용하는 공동체로서 림부르크 교구 소속입니다.

여러분이 50주년을 기념하는 날은 한국의 첫 사제이신 성 김대건 인드레아 신부님 축일입니다. 그는 믿음 안에서 사셨고 믿음 때문에 순교하셨습니다. 이 순교자의 증언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굳셈은 용기와 자극을 줍니다. 알버트 성당 입구에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이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성인께서 미사에 오는 신자들을 맞이하며 여러분의 전통을 상기시켜줍니다. 또한 미사 후에 성당에서 나올 때는 우리 모두 세례를 통해 갖게 된 복음 전파의 의무를 상기시켜줍니다.

여러분 본당에서 선교 활동이 차지하는 비중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여러 해 동안 한인 본당의 많은 성인 예비 신자들이 림부르크 주교좌성당에서 받아들이는 예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예비 신자들의 증언 또한 많은 이에게 영감을 줍니다. 많은 신자분들, 단체들, 활동들을 통해 보여주는 여러분의 신앙고백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전구로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림부르크 교구와 여러분의 모든 여정 안에서 함께 이끌어 주시길 기원합니다.

림부르크 주교 게오르크 배칭


* 본 번역은 김현수 요한 보스코 형제께서 수고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문순남 보니파치아 수녀님


저는 1961년 7월 독일 트리어에 있는 성 가롤로 보로메오 수도회에 입회하기 위해 독일에 온 문 보니파치아 수녀입니다. 프랑크푸르트 한인 공동체가 설립 50주년을 맞이하게 됨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지면을 통해 제가 알고 있는 초창기의 역사에 관해 짧게 공유하고자 합니다.

중국에서 선교사로 일하셨던 아이힝어(Eichinger) 신부님은 1960년부터 가톨릭 신자를 중심으로 한국 간호사와 간호 학생을 독일로 초청해서 근무와 공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셨습니다. 1961년 7월 일과 학업을 위해 43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저희 12명의 수녀원 지원자들과 함께 한 일행이 되어 독일에 도착했습니다. 1967년 1월 29일에는 마인츠 대학 병원에 60명, 마인츠 알리스 병원에 5명의 간호사가 도착한 후 언어와 문화 차이에서 발생하는 많은 문제점으로 저는 그들을 돕기 시작하였는데 그 때에 많은 이들이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예비자 교리반을 시작하게 되었고 신앙 생활의 기반을 잡게 되었죠. 마침내 1968년도에는 28명의 한국인들이 마인츠 돔에서 세례 성사와 견진 성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1968년 윤공희 대주교님을 처음 모시고 한국 사제의 필요성을 알린 후 몇 신자들과 함께 독일 주교 회의에 공문을 제출했습니다. 그 결과로 우선 쾰른 교구에 박영규 발라바 신부님께서 오시게 되어 루르 지방 5교구를 중심으로 사목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마인츠 교구에서는 헤르만 볼크 추기경님께서 한국 사제 한 분을 모실 수 있도록 허락을 해 주시어 마침내 1970년도에 수원교구의 김춘호 신부님께서 오시게 되었습니다.

교구에서는 새로 오신 한국 사제를 위해 사제관과 자동차를 한 대 마련해 주셔서 사목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분들이 공동체를 위해 알게 모르게 봉사를 많이 해 주셨는데 특히 오정숙 에디트 자매님께 감사드립니다. 설립 때의 모습을 지켜보아서 그런지 프랑크푸르트 본당 50주년을 맞는 감회가 새롭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는 낯선 외국 땅에서 우리나라 말로 미사를 드리며 신앙 안에서 많은 희망을 갖게 해주시고 하느님 안에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은총을 주셨다는 것이겠지요.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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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축하 메시지


김현지 안토니아 (6대 청년회장, 2014): 프푸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예전 청년회장들에게 연락이 왔어요. 청년부에서 40주년을 준비하던 그 순간들이 너무 또렷한데 벌써 50주년이라니...! 비록 지금은 함부르크 소속이지만 프푸 본당에서 청소년부, 청년부 활동도 하고 세례도 견진도 받아 늘 신앙의 고향으로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청소년, 청년들에게 신앙의 씨앗들이 뿌려 지기를, 또 그들에게 프푸 본당이 쉼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양현동 예레미아 (7대 청년회장, 2015): 프랑크푸르트 본당 5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주님의 은총과 축복속에서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신봉수 세례자 요한 (9, 10대 청년회장, 2017, 2018): 힘들고 기댈 곳 없는 독일 생활에 하느님 가까이에서 현명하게 헤쳐 나갈 수 있게 도와준 프랑크푸르트 한인성당과 공동체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사랑하고 감사하는 곳이기에 프랑크푸르트 한인 성당의 50주년은 더욱더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진심으로 축하하고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하느님을 만나고 의미 있고 따뜻한 곳이 되길 바라며 항상 기도하겠습니다.

이헌준 토마스 아퀴나스 (11 대 청년 회장, 2019): 프랑크푸르트 한인 공동체 5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든 유학생들에게 그렇듯 저에게도 아주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한인 공동체를 지금까지 지켜 주셔서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한인 공동체 안에서 좋은 일들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최민해 노엘 (5대 청년회장, 2013): 프랑크푸르트 본당 설립 50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항상 지난 50년과 같이 주님의 축복 속에 행복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강주희 유스티나 (12 대 청년 부회장, 2020): 고등학교 졸업하고 40주년을 축하했는데 어느덧 50주년이 되었네요. 하느님 사랑 아래 많은 인연들과 웃음과 행복 그리고 슬픔도 함께 나눌 수 있던 저희 공동체의 50번째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나스티아 엠데: 항상 제 삶의 일부였던, 나의 성장을 도와주고 지켜봐 준 프랑크푸르트 한인성당, 50주년을 축하합니다! 멀리서도 항상 응원하고 기도합니다.

양효진 리디아: 먼 타향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간직해 온 프푸 공동체의 50주년을 축하합니다. 그 사랑을 디딤돌로 저의 독일생활이 풍성할 수 있었음에 참 행복했습니다. 더불어 50년의 역사를 작게나마 함께 쌓아 갈 수 있었음에 공동체 모든 지체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김희은 그라시아: 50년 전에 시작된 한인공동체 덕분에 제가 독일에서 한인 성당 공동체 활동을 즐겁게 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전우연 아녜스 (2대 청년 회장, 2010): 프랑크푸르트 본당 설립 50주년을 축하합니다. 프랑크푸르트 한인교회 공동체 안에서 넘쳐나는 사랑을 경험하며 유학 생활을 보냈던 시간이 항상 그립습니다. 50주년에 축하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프랑크푸르트 한인 천주교회에 자비하신 하느님의 은총이 가득하시어, 앞으로도 계속해서 서로 일치된 마음으로 베풀고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참 사랑이 넘쳐나길 바랍니다. 모두 건강하세요.

안지예 미카엘라 (12 대 청년 회장, 2020): 프랑크푸르트 한인성당이 50주년이라는 소식은 저에게 경이로웠습니다. 한국에서 성당생활을 했던 저에게는 타지에서 ‘한인 성당’ 이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프랑크푸르트 한인성당은 공동체 그리고 가족이었습니다. 특히 가족 없이 온 청년들에게는 따뜻한 밥이었고, 든든한 힘이었고 따스한 위로였습니다. 4년간의 프랑크푸르트 한인성당 활동을 하면서 저도 이곳 공동체가 가족같이 느껴졌습니다. 새로 온 청년들을 이곳에 청소년부터 청년까지 자리를 지켜주며 따스하게 맞아주는 청년들과 유럽 성서모임의 중심을 이루며 유럽 청년들과 함께하기까지, 프랑크푸르트 한인성당은 저희 유럽 청년들에게도 든든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요즘 코로나로 인해 매주 보던 친구들을 못 보게 되었지만 근래에 미사가 다시 시작되면서 미사후에 안부를 묻는 청년들의 눈을 보며 명절에 만난 가족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앞으로도 프랑크푸르트 성당이 저희 청년들에게 사랑과 위로를 주는 집으로 계속해서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안정기 가롤로 보로메오 (3대 청년회장, 2011): 10년 전 태권 도복을 입고 뛰어다니며 40주년 행사 축하 공연을 준비하며 10년 뒤 50 주년 땐 얼마나 큰 공연을 준비할까 생각했던 것이 기억나요. 아쉽게 코로나 상황 때문에 이번엔 특별한 공연을 준비하지 못했지만 그 아쉬운 마음을 저희 청년들이 프랑크푸르트 본당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항상 저희 청년회에 많은 사랑과 관심 가져 주시는 많은 분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드리며 사랑하는 프푸 본당에서 하느님을 만나며 살아가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청년회가 되길 기도하며 그 옆에서 항상 응원합니다. 프랑크푸르트 본당 설립 50주년 축하하며 앞으로 60, 70, 그리고 100주년까지 지금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성당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함께 한 공소 50년


슈투트가르트 공소, 50년 발자취

이정림 수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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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슈투트가르트 한인 가톨릭 공동체는 프랑크푸르트 한인 성당의 한 공소로서도 거의 50년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70년경 파독 간호사들의 작은 모임에서 시작하여 타국생활의 어려움을 신앙 안에서 함께 나누는 공동체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공소 역사로 기록된 자료들이 적어 ‘처녀적…’이라고 회상하시는 은퇴하신 자매님들의 기억부터 시작하여 이리저리 흩어져 있던 사진들을 모아가며 지난날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니, 저희 공소는 시기에 따라 공소 구성원들의 변화도 많았으며, 독일을 떠나신 분들에게는 저희 공소가 아주 좋은 추억의 한 부분이 되어 있음을 알게 되기도 했습니다. 시기에 따라 때로는 크고 때로는 너무 소박할 때도 있었지만, 하느님께서 공소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셔서 주님 보시기에 좋은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공소의 첫 시작은 70년대 초 마인츠 성당에서 한국 신부님이 오시면서 한 달에 한 번 있는 미사에 스무 명 남짓한 간호사 분들이 모이면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모임은 대부분 간호사로 근무하시는 병원 기숙사 시설을 이용하였고, 미사는 병원에 있는 경당에서 보았습니다. 자매님들이 ‘처녀적'이라 기억하시는 그때에, 특히 김춘호 베드로 신부님께서는 1박 2일로 오셔서 하루를 피정처럼 성경 공부와 신앙 강의를 해 주셨고, 한국 성가를 배우고 또 부르는 시간이 참 좋았다 회상하십니다. 외로운 타국생활 중에 모국어로 배우는 성경말씀이 마음에 많이 와닿는 은혜로운 시간이었기에 한 달에 한 번 오시는 신부님을 무척 기다렸다고 하네요. 또 부활과 성탄 대축일에는 마인츠 본당 미사에 함께 참석하기도 하고, 장기자랑도 준비하면서 타국생활의 외로움을 신앙생활과 함께 달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 간호사들이 근무하는 병원을 돌아가며 미사와 모임을 하다가 정식으로 독일 성당을 빌려 미사를 보게 되면서부터 서로 간의 연락과 음식 준비, 독일 공동체와 관련된 사무적인 일들을 봉사하는 회장직이 임명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회장님들은 미사 준비와 공소 소식을 신부님과 편지로 주고받았다며 편지를 아주 많이 쓰셨다고 기억하십니다. 하지만 한국 음식 냄새 때문에 이곳저곳 성당을 옮겨 다니는 어려움도 있었고, 때론 독일 공동체가 쓰지 않는 친교실을 찾아가면서 공동체 모임도 하셨답니다.

1978년과 1979년을 기점으로 비자 문제와 결혼 적령기에 있던 자매님이 대부분 귀국을 하게 되면서 공동체는 독일에서 가정을 이룬 아주 작은 인원만이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행이 1980년 초반, 한국에서 독일 연구소로 공학 박사과정을 오는 분들이 늘어나게 되고 그분들 가족들을 주축으로 공소는 다시 활력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많아지고 공소는 예전과는 달리 여러 면에 있어서 풍성해졌습니다. 또 기존에 공소를 다니시던 분들과도 좋은 화합을 이루어 귀국하신 후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셨다고 하네요.

1990년경부터는 슈투트가르트 지역에 있는 대학으로 한국 학생들이 유학을 오기 시작합니다. 결과적으로 공소에도 학생들이 많아지게 되면서, 학생들이 미사 전례도 진행하고 미사 반주 봉사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소 소식지인 ‘씨앗’ 지도 이때부터 학생의 도움을 받아 발행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공소 소식지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공동체 미사는 힘든 유학생활의 어려움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 되기도 했으며, 또한 자매님들은 한국 음식을 접하기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서 미사 후에 나눌 한국 음식도 정성껏 준비하셨다고 합니다.

2000년대에는 독일로 파견근무나 취업이 되어 이주해 오는 가정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공소는 그 가족들이 주축을 이룹니다. 공동체 구성원들도 다양해지면서 공소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지요. 또한 힘든 타국 생활 안에서 가톨릭 신앙 공동체의 중요함을 느끼게 되면서 공동체는 더욱 체계를 갖추기 시작합니다. 회장을 선출하여 회장 중심으로 임원단이 구성되고 각 분과들이 생기고 공동체 일들이 분담되면서 예전과는 달리 효율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가게 됩니다. 늘어나는 신자 관리와 친교를 위해서 소공동체 반을 구성하게 됩니다. 반장을 중심으로 반모임을 주기적으로 하게 되면서, 반을 통하여 매주 미사가 없어 놓치기 쉬운 공소 소식과 소홀할 수 있는 친교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공동체의 행사도 반모임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밖에 없는 미사에 부족함을 느끼던 저희가 본당에 요청하여 첫째 주는 부제님을 모시고 공소 예절도 하게 되었습니다. 미사 후 친교 시간은 꾸준히 이어져, 각자가 조금씩 준비해오는 음식들로 친교의 시간들은 부족함이 없이 항상 풍성하게 채워졌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과 인터넷 시대라 한국과의 심리적 거리가 그리 멀지 않지만, 인터넷 시대 이전에는 한 달에 한 번 하는 미사는 독일에서 한국을 만나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서로의 안부도 묻고 독일 살아가는 이야기도 하며 준비한 음식을 나누는 따뜻한 친교의 시간을 이루었습니다. 그 친교의 시간이 발판이 되어 공소도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신부님이 상주하지 않은 공소 공동체이고 매주 미사가 없다 보니 공동체와 멀어지고 신앙 생활도 소홀해지는 아쉬움도 있습니다. 반면에 바쁜 한국 생활에 비해 상대적으로 여유 있는 이곳 생활을 시작하면서 한국에서 소홀히 했던 신앙 생활을 다시 하고자 오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최근 저희 공동체는 로텐부르크 교구에 정식으로 한국인 가톨릭 공동체로 등록되어 교구의 도움으로 성당사용과 그 외에 금전적인 지원도 받고 있습니다. 교구에서는 한국인 가톨릭 공동체가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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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투트가르트 공소 공동체는 외형만이 아니라 영성적인 부분에서도 하느님의 공동체다운 모습으로 채워가게 됩니다. 자매님들은 거룩한 독서 모임을 몇 년 동안 꾸준히 진행하셨고, 지금은 성경모임이 청년과 장년으로 나누어 진행되고 있습니다. 또한 공소 자체적으로 피정과 특강을 기획하여 신자들의 영성 생활에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신심단체로 1990년도에 창단되었다가 폐단된 레지오 마리애가 2010년에 '사랑하올 어머니' 쁘레시디움으로 새롭게 창단되었습니다. 한때 단원 수 부족으로 폐단의 위기도 있었으나, 성모님께서 새로운 단원들을 보내주셔 학생, 직장인, 주부까지 다양한 단원들로 구성되어 지금까지 500차 넘는 회합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본당의 도움으로 유럽지역 한인 꾸르실료 교육에도 참석하여 현재 12명의 꾸르실리스타들이 공소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봉사와 친교를 위한 마리아회가 여성 신자분들로 만들어졌습니다, 마리아회 회장님을 중심으로 엄마와 같은 마음으로 공소를 위한 다양한 봉사를 하고 계십니다. 공소의 대소사도 챙기시고 행사가 있으면 준비도 해 주시며 바자회와 음식판매로 얻은 수익금으로는 공소에 필요한 부분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으십니다. 저희 공소는 어린이를 위한 첫영성체 교리교육도 자체적으로 실시하고 있으며, 첫영성체 교리 후에는 복사단 활동으로 이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천주교 신앙을 찾아오시는 새 신자들이 생기면서 본당처럼 ’함께하는 여정’ 모임을 통해 2009년부터 지금까지 25분이 공소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희 공동체는 애정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봉사해 주신 분들의 노력으로 신앙 공동체를 유지하고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좋은 공동체를 위해서는 갈 길이 멀기도 합니다. 때론 신부님이 가까이 계시지 않아 생기는 어려움도 있지만, 하느님께서 저희 공동체와 함께 하시면서 하느님이 보시기에 좋은 공동체로 이끌어 주시리라 믿으며 항상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 15, 4-5)

저희 공동체도 언젠가 풍성한 열매를 맺는 포도나무 가지가 되어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브리켄 공소, 주님께서 함께하신 시간

이금란 모니카


+ 찬미 예수님

프랑크푸르트 본당 설립 50주년을 맞아, 본당과 저희 자브뤼켄 공소에 주님께서 함께하신 발자취를 기억해 봅니다. 프랑크푸르트 본당의 지난 50년과 자브뤼켄 공소의 탄생과 현재는 주님의 사랑과 이끄심이 함께 계셨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역사적인 증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90년대에 들어서는 김석중 루드비코 신부님과 함께 세례성사, 혼배성사, 장례미사와 피정 등 공동체가 나눌 수 있는 희노애락을 함께하며 저희 공소는 더욱 단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91년에는 김석중 루드비코 신부님의 권고로 프랑크푸르트 본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뤼쎌스하임 한인성당에 소속되기 시작하였고, 93년에는 안철문 이냐시오 신부님의 지도 아래 7명의 단원들로 구성된 '사랑의 샘' 쁘레시디움이 저희 공소에 창단되기도 하였습니다. 활발하게 활동하던 사랑의 샘 쁘레시디움이 아쉽게도 일부 단원들의 한국행으로 인해 2년 간의 모임을 끝으로 해단되었지만, 저희 공소는 끊임없이 주님께 간구하며 신앙을 계속 키워 나갔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이끄심으로 97년도부터는 지금의 자알란트 대학교 대학 경당에 저희 공동체가 정착하여 진정한 공소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이전에 겪었던 쁘레시디움 해단의 아픔은 성모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보살핌으로 2016년에 '가정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창단되면서 치유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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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알란트 대학교에 공소가 정착한 이후 지금까지 저희 공소는 다양한 사목활동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나라 선포에 더욱 열정적으로 참여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기치 않은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공소의 모든 공식적인 활동이 중단되어 있지만, 저희 공소는 적은 인원을 무기로 온라인을 통한 복음말씀 묵상하기, 미사 봉헌, 성서쓰기 등을 다 함께 꾸준히 진행하면서 각자의 믿음이 식지 않고 오히려 더욱 굳건해질 수 있도록 서로에게 신앙의 불씨가 되어주고 있습니다. 하루 빨리 이 팬데믹 상황이 끝나 한 달에 한 번 가뭄의 단비처럼 여겨지는 본당 신부님과 함께하는 미사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프랑크푸르트 본당이 선교와 나눔을 통하여 영적으로 교민들을 이끌고, 주님 안에서 교민들의 마음의 쉼터로 더욱 공고히 자리잡을 수 있도록 저희 자브뤼켄 공소가 늘 함께하겠습니다. 프랑크푸르트 본당의 설립 50주년을 축하하며, 본당과 저희 공소에 주님께서 함께하신 발자취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을 허락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다시 한 번 프랑크푸르트 본당의 설립 50주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하하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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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셀 공소, 그 50년을 뒤로 하며

오선희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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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우리가 이곳 카셀 근교로 이사 온 지도 벌써 50년이 되었군요. 처음부터 우리 카셀 공소는 가족적인 분위기를 갖는 작은 모임이었습니다. 70년 말 즈음 김춘호 베드로 신부님이 계실 때나, 80년 초 이수현 보나벤뚜라 신부님이 계실 때에는 대부분 이기영 안토니오 형제님 댁에서 가정미사를 봉헌했지요. 물론 그 때는 몇 가정이 되지도 않았고 다들 근무하며 아이들을 키우느라 때 맞춰 미사에 참석하기도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러다가 이태주 알로이시오 신부님 때에 저희들이 지금의 알테스하임 카펠레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되었지요. 처음에는 매달 넷째 토요일 14시에 만났었는데 오성기 크리소스토모 신부님 때에 매달 처 토요일 13시로 변경하면서 미사 후에 함께 식사도 하고 커피도 마시며 다소의 즐거운 시간을 나눌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면서 주변에 게신 형제 자매님들이 조금씩 참석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첫번째 토요일이면 멀리 도르트문트, 괴팅엔, 한-뮌덴, 마르부르크, 멜중엔에서 열심히들 참석하십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새로 영세 받으신 분들, 혼배 성사로 인해 늘어나는 배후자들, 또 새로 태어나는 아기들로 인해 식구들이 조금씩 늘고 있습니다. 정말 즐겁고, 반갑고, 복된 일입니다. 또 다른 일은 우리 공소에서도 일년에 한 번씩 야외 미사를 드리면서 반드시 교우가 아니더라도 관심이 있으신 분을 초청하여 함께 미사도 봉헌하도 미사 후에 그릴도 하며 맛있는 식사를 나누며 친교 시간을 가졌었지요.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코로나 때문에 올해는 그 만남도 없이 여름이 다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희에게는 한 달에 한 번 만남이 힘들고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만나서 얼굴을 보는 순간 모든 것을 잊고, 즐겁고 기쁘고 흐뭇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 수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들 한 마음으로 협조하고 봉사하며,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9월말에 우리가 프랑크푸르트 근교로 이사를 하게 되지만, 저희가 떠난 후에 카셀 공소가 더 발전하고 단합하여 사랑으로 하나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진심으로 기도드립니다. 항상 먼 길 불구하시고 오시는 신부님과 수녀님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더 많은 성원과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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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부르크 공소, 작은 사랑의 공동체

문재상 안드레아 신부님


독일의 서남단,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약 세 시간 거리에 작고 아름다운 도시 프라이부르크가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에도 작은 한인 천주교 공동체가 있는데요, 학생 도시의 특성상 구성원은 현재 모두 학생입니다. 학생이 주축인 공동체라, 공동체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습니다. 다만 과거의 연표를 보면, 1971년 6월에 마인츠 한인 공동체 (현재의 프랑크푸르트 공동체)의 초대 주임 신부님이신 김춘호 베드로 신부님께서 프라이부르크 교구로부터 한인 신자들의 사목권을 받으면서 프라이부르크 한인 공소의 역사가 정식으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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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부르크는 ‚학생의 도시‘라는 별명에 걸맞게 이전부터 많은 유학생들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다고 하는데요, 신학의 중심지 가운데 한 곳이기도 해서 이미 60년대부터 이곳에서 공부를 하던 신부님들이 계셨다고 합니다. 유학을 하는 신부님들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꾸려졌고, 한 달에 한 번씩 함께 모여 미사를 하던 전통이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현재에도 총 다섯 분의 사제와 한 분의 수도자가 공부를 하고 있고, 두 명의 신학생이 프라이부르크 신학교에서 양성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다양한 공부를 하는 열 명 남짓의 학생들이 정기적으로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저희 공동체는 매달 네번째 주일 오후 세 시에 가톨릭 대학 경당에 함께 모여 미사를 드리고, 미사 후에는 식사나 다과를 함께 하며 친교를 다지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본당과는 가깝지 않은 거리이기도 하고, 또 프라이부르크에 끊이지 않고 학생 신부들이 있었기 때문에, 매달 드리는 공동체 미사는 이곳의 학생 신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일 년에 한번씩은 프랑크푸르트 본당 신부님과 공동체 식구들이 프라이부르크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정식으로 프라이부르크 공소가 마인츠 공동체에 속하게 된 1971년부터 이 방문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이를 통해 프라이부르크의 학생들은 소속감과 감사함, 더불어 누구로부터 보살핌을 받는다는 '따스한 느낌‘ 역시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아울러 프랑크푸르트 본당의 날이나 청년 피정 등의 행사에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참석을 하며, 함께 한다는 것의 소중함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항상 마음을 써 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간혹 교환학생으로 나왔거나, 연수를 나오신 분들 가운데 공동체를 찾아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힘든 유학생활을 홀로 하다가 의지할 곳이 필요해서 공동체를 방문했다가, 세례를 받기까지 원하시는 분들도 계시고요.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공동체이지만, 누군가 이 작은 공동체 안에서 위안을 느낀다면, 누군가 이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느낀다면, 그것으로 이 공동체의 존재 이유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프라이부르크는 무척 작은 공동체이고, 구성원 역시 자주 바뀌는 편입니다. 제가 2012년 가을에 이곳에 왔는데, 처음 공동체에서 봤던 사람들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정도이니까요. 하지만 여전히 함께 모여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사를 드릴 수 있음에 모두에게 감사를 드리며,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느님께 더욱 큰 감사를 드립니다.

프랑크푸르트 본당의 50 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하느님께서 공동체를 항상 굽어 살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국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신비로운 당신의 섭리로 돌보시는, 이방인들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영광과 찬미를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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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단체 단사


레지오 마리애, 시작과 지금

하춘자 마리아


본당 50주년을 축하하며 신심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의 생성 과정을 간략하게 나누고자 합니다. 독일 레지오는 제 2차 대전이 유럽을 황폐하게 만들었던 1944년부터 시작하여 그 당시 독일 패전이 목전에 이르렀을 때 레지오 상급 기관인 꼰칠리움 레지오니스에서는 유대인의 혈통으로 빈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거주하면서 4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피어텔 여사를 발탁하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독일 입국이 불가능하여 독일로 들어오는 미군 통역으로 신분을 위장하여 입국한 후 독일 레지오를 창단하게 되었습니다. 독일 전역에 레지오를 확산시킨 후 그는 1948년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하여 세나투스를 세워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1960년부터1980년까지 독일이 이루어 낸 경제성장과는 달리 약 20년간 단 하나의 쁘레시디움도 창단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피어텔 여사는 레지오의 장래를 몹시 염려한 끝에 성모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1982년 2월 이탈리아 성모 성지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마지막 날 조그마한 성모 성당에서 아침 미사를 봉헌한 후 성모 상 앞에 무릎을 꿇고 20년 동안 드렸던 간절한 소원을 다시 아뢰었을 때 "네가 집에 돌아가면 3일 만에 기쁜 소식이 있을 것이다" 라는 성모님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그 응답의 메시지를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와 기쁜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 중에, 저희 부부가 레지오 창단을 위해 원죄없으신 성모상과 백실리움을 구하려는 과정 속에 피어텔 여사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성모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 우리들의 만남은 나의 문학적인 언어로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는 감격과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인 1982년 2월 28일 샛별 프레시디움이 창단되었습니다.

샛별 쁘레시디움은 4명의 선서단원과 6명의 예비단원으로 함께 첫 주회를 가졌습니다. 첫 주회에서 유럽에 있는 한인 성당에 레지오를 창단하고 유럽 한인 성당에 레지오를 확산시키는 것, 레지오 단원의 개인 성화, 매일 고리 미사가 훈화와 활동 지시 사항이었는데, 이는 지금도 저의 가슴 속에 생생히 살아 움직이며 신앙 생활에 일용할 양식이 되고 있습니다. 단원 수가 적어 매일 고리 미사라는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미사 참석해야 하는 어려움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평일 미사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계속되었습니다. 평일미사 참석, 성채조배, 묵주기도가 활동 보고 내용이었는데 이는 세나투스에서도 승인해 준 활동이었기에 지금까지도 이 활동보고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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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별 창단 5년 후인 김옥순 엘리자벳 자매가 본으로 이사를 가 그곳에서 1987년 평화의 모후를 창단하였고요, 이곳 본당에서는 샛별에 이어 1988년 인자하신 모후, 1990년 원죄없으신 모후, 19991 증거자들의 모후를 창단하였고, 1991년 귀임하신 안철문 신부님과 아빌라 수녀님과 함께 1992년 천사들의 모후,와 신비로운 장미, 1993년에는 하늘의 문과 평화의 모후가 창단하였습니다. 더우기 1993년 4월 30일에는 가난한 자들의 모후 꾸리아가 창단되었고, 그해 12월에는 은총의 모후가 창단하게 되었지요. 그 후 김광태 야고보 신부님이 계시는 동안 자비의 모후, 로사리오의 모후, 슈투트가르트의 사랑하올 어머니, 하늘의 문과 사도들의 모후가 창단되었고, 정유진 마태오 신부님 때에는 바다의 별이, 최용준 안토니오 신부님과는 멀리 자브리켄에서 가정의 모후와 제네바에서 즐거움의 샘이 창단되어 2020년 8월 말 현재 프랑크푸르트 본당에는 16개의 쁘레시디움, 142명의 정단원, 6명의 쁘레또리움 단원, 218명의 협조단원과 7명의 아듀또리움 단원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한국 레지오 꾸리아의 창단은 독일 레지오의 역사에도 기록될 만한 사건이었고 레지오 상급기관인 꼰칠리움 레지오니스에서는 레지오 역사상에 없는 레지오 기적이며 하느님의 축복임을 축하의 인사로 대신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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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 단원들 사이의 인간 관계는 물론 공동체 내에 이웃과의 생활 속에서 밀물처럼 밀려드는 모순과 부조리들이 우리 생활 주변을 어둡게 할 때, 그 어둠을 없애려고 수다를 떨면서 근심하며 돌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의 불을 켜서 주위를 밝히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남을 변화시키기에 앞서 자신이 먼저 변화되고 성화되어야만 하는 그 십자가의 갈을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고통의 우리 어머니 성모님처럼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신다는 사랑의 진리를 자주 묵상해 봅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 필리피서 4,13



유럽 성령쇄신 묵상회 단사

김윤숙 글라라


성령쇄신 운동은 1967년 미국에서 시작되었으며, 독일에서 한인 성령쇄신 운동은 이미 미국에서 성령 세미나를 받고 독일에 거주하던 미군 군속 가족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주독 미군 한인 가톨릭 모임의 대표자인 이애선 마리아는 당시 미국에서 사목 중인 왕영수 프란치스코 신부님을 초청하여1989년 5월7일부터 11일까지 크란스베르크에서 제1차 성령 묵상회를 주최하였습니다. 이 묵상회에 마인츠 본당 신자들 11명이 참석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후에 유럽 성령쇄신 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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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제2차 독일 성령 쇄신 묵상회 이후, 주독 미군 철수로 많은 미군 군속 가족들이 독일을 떠나게 되어 성령쇄신 운동의 중심점은 서서히 마인츠 한인 공동체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제3차 성령쇄신 묵상회 이후 성령쇄신 운동의 구심점이 마인츠 본당으로 옮겨지면서 증가된 기도회 회원들은 기도회가 조직화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절감하며 1991년 9월 22일 총회를 열고 조준호 분도 부제님을 기도회 초대 회장으로 선출하였습니다. 그 해 8월에 부임한 안철문 이냐시오 신부님은 1991년 11월 30일 '성령 기도회'를 본당의 신심 단체로 인준하고 이 후 성령쇄신 운동은 본당 신부의 지도 아래 체계를 잡아가게 되었습니다. 제4차 성령쇄신 묵상회 후 유럽 성령쇄신 운동의 성장을 위하여 안철문 이냐시오 지도 신부님은 봉사자들을 임명하여 '성령쇄신 봉사회'가 출발하게 되었죠. 발족된 봉사회는 매월 1회 회합을 갖고 성령쇄신 운동의 방향을 제시함은 물론, 교재를 연구하며 자체적으로 봉사자 교육을 실시하여 유럽내 성령쇄신 운동의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됩니다. 봉사회는 비엔나 본당 1차, 3차와 스위스 본당 1차 성령쇄신 묵상회를 지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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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묵상회에는 독일내 신자는 물론 라스 팔마스, 파리, 비엔나 등의 신자들도 참여하게 되어 1995년 5월 23일부터 27일까지 열린 제 7차 성령쇄신 묵상회부터는 '독일 성령쇄신 묵상회'에서 '유럽 성령쇄신 묵상회'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또한 같은 해1995년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성령쇄신 운동의 발전을 위해 제1차 성령쇄신 봉사자 교육을 독일 쇤쉬타트에서 실시하였고, 이듬해인 1996년 9월 1일에는 독일 교포 사목자 협의회에 상정하여 봉사회의 명칭이 ‘독일 한인 성령쇄신 봉사회‘에서 ‘유럽 한인 성령쇄신 봉사회‘로 개칭되었습니다.

성령쇄신 운동은 모든 신앙인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령 안에서의 새생활‘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성령쇄신 운동은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졌던 하느님의 사랑을 새롭게 체험하게 해주고 하느님이 우리 삶의 최종 목적이시며 우리 삶의 원천이심을 알게 해줍니다. 성령쇄신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과 더욱더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맺게 될 것입니다.

매년 개최되는 성령쇄신 묵상회는 어느덧 32차를, 격년으로 열리는 봉사자 교육은 17차를 앞두고 있습니다.




울트레야, 그리스도는 당신만을 믿습니다.

강소영 율리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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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 설립 50주년을 축하하며 본당 신심단체 중 하나인 울뜨레야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울뜨레야(Ultreya)의 어원은 라틴어 eia ultra (앞으로 전진)로 스페인어의 '전진하라, 나가자'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유럽 순례자들이 서로 나눈 인사말이었습니다. 아마도 길고 힘든 순례의 여정에 낙오하지 말고 전진하라는 격려의 인사였겠지요. 이러한 ‘전진하라, 여기까지 와라’ 라는 의미의 울뜨레야는 3박4일간의 꾸르실료에 참여함으로써 자신과의 만남, 그리스도와의 만남, 이웃과의 만남을 체험하고 이상, 순종, 사랑의 정신으로 사회 환경속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본당 형제 자매들의 꾸르실리스따 모임으로 크리스찬으로서 기본적인 것을 생활화 하도록 서로 격려하며 함께 우정을 나누기 위한 꾸르실료 운동의 모임입니다. 울뜨레야의 회원 자격은 우선 '꾸르실료'라는 교육을 수료한 자에게만 주어집니다.

그렇다면 꾸르실료는 무엇일까요? 꾸르실료(Cursillo)라는 말은 영어의 course, 즉 과정이라는 뜻의 스페인어입니다. 여기에 접미사 -illo가 붙어 '작은 Curso' 즉 영어로 'a little course'라는 뜻이 됩니다. 우리 나라말로 '단기 강습'이란 뜻이 되겠지요. 흔히 '꾸르실료 운동'이라고 줄여서 말하지만 정식 명칭은 '크리스챤 생활의 꾸르실료 운동' 이라 하고, 교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많은 영성 교육 중 하나이며 3박 4일 동안 교육받는 단기 교육으로써 주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 주님의 뜻을 더욱 깊이 깨닫고 모범이 되는 봉사자로 교회와 일상생활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신앙을 실천하게 하는 '과정' 의 영성 교육입니다.

한국에 꾸르실료가 처음 도입된 해는 1967년으로 주한 미 평화봉사단장으로 한국에 머물던 케빈 오도넬(Kevin O'donnell)씨와 필리핀 꾸르실료 운동에 깊이 참여하고 있던 에드문도 카이모(Edmundo F. Kaimo)씨가 한국에 꾸르실료 운동을 도입할 필요성을 공감하고 서울 성수동 성당에서 신부 4명과 평신도 17명이 모여 첫 꾸르실료를 개최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제 1차 꾸르실료를 체험한 이들은 필리핀 신자들과 함께 2차 꾸르실료를 진행했고, 3차(1967.8.24~27)부터는 한국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제 3차 우리말 꾸르실료가 성공적으로 실시된 후 빠르게 확산되어 1971년에는 전국 14개 교구 한 곳도 빠짐없이 꾸르실료가 도입되었습니다. 1994~1998년에는 세계 꾸르실료를 대표하는 세계협의회(OMCC) 회장국이 되었으며, 1997년에는 한국 꾸르실료 지도자들과 세계 33개국 대표 165명이 함께 하여 총 250여명이 참석한 제5차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열리기도 하였습니다. 꾸르실료 도입 53년째를 맞는 한국 교회는 그동안 22만명의 꾸르실리스따를 배출하였으며 2000년부터는 청년 꾸르실료를 실시하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기도 합니다.

프랑크푸르트 본당에 꾸르실료가 최초로 도입된 것 은 1982년 4월. 당시 독일 교구 주최로 실시되었던 3박 4일 꾸르실료 교육에 본당 교우 3명이 참석하여 본당 최초의 꾸르실리스타가 탄생되었습니다. 이후 프랑크푸르트 본당은 1992년 1월 16일 벨기에의 반뇌에서 유럽한인 여성 1차 꾸르실료를 시작으로 2020년 현재까지 약 250명의 꾸르실리스타를 배출하였습니다. (여성 1차~15차, 남성1차~11차, 혼성 1차 ) 이는 유럽한인 꾸르실료 사무국을 맡고 있는 독일 퀼른 한인 천주교회 다음으로 많은 인원입니다. 울뜨레야 모임은 1992년 유럽 한인 꾸르실료 1차 교육 직후 구성되었습니다. 현재 다른 신심 단체들과 같이 코로나 19로 잠시 활동이 중단되고 있으나 울뜨레야 미사 및 회합은 분기별로 실시되며 혼성 1차 와 여성 15차는 매월 팀 회합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울뜨레야는 하느님을 체험하는 회심의 여정인 꾸르실료 운동을 위한 모임이며, 꾸르실료 운동을 통하여 체험한 하느님의 은총을 바탕으로 교회 안밖에서 봉사자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한 모임입니다. 울뜨레야 회원인 프랑크푸르트 꾸르실리스따들은 현재 본당 및 구역 사목협의회를 비롯한 신심 및 봉사 단체의 간부 혹은 소속 회원으로 중축적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맡은 바 사도직 소명과 본당 발전에 열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로서 교회에 봉사할 뜻을 둔 사람이 선배 꾸르실리스타의 추천을 받아 울뜨레야 간사와 본당 신부님의 동의를 얻고 교육에 참가하게 되면 꾸르실리스타가 됩니다. 이 교육을 수료한 후에는 자동으로 울뜨레야 회원의 자격을 얻게 되지요. 꾸르실료 교육 내용은 꾸르실료 교육 목적이 훼손될 염려가 있기 때문에 다른 신심 단체와는 달리 비밀 사항입니다. 그러나 교육의 깊이와 효과가 조직적으로 잘 되어있어 하느님을 체험하는 은총을 얻는 여정입니다. 꾸르실료를 통해 하느님께서 항상 여러분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직접 체험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는 당신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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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50년을 맞이하며


정원홍 에드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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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으로서 부활절에 “부활 축하합니다!”라고 나누는 인사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사의 의미를 되뇌며 우리 프랑크푸르트 한인 천주교회 공동체의 설립 50주년을 축하합니다!

지금의 자랑스러운 우리 공동체는 5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묵묵히 빛으로 또는 소금으로 타인의 모범이 되셨던 많은 분들의 역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의 사도로서, 빛이 필요하고 소금이 필요한 이들의 자리에서, 말씀 안에서 “빛을 비추어 주고, 맛으로 소금이 되어”, 우리 공동체와 주변의 이웃을 더욱더 빛나고 맛나게 해주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따라만 가기에도 버겁게 빠르게 변해가는 우리 공동체를 둘러싼 대내외적 환경은, 함께 나누면서 풀어 나가야 할 몇 가지 과제이자 명령을 우리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감사, 일치, 부활이라는 신앙공동체 언어로 의견을 나눠봅니다.

  1. 서로에게 감사하는 신앙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 사목자는 평신도와 봉사자에게
    • 평신도는 사목자와 봉사자에게
    • 봉사자는 평신도와 사목자에게

    우리 공동체 일원이 된 기간이 오래지 않은 기고자의 편향된 인식이기를 바라지만, 그 동안 느껴온 점은 우리 본당공동체의 구성원 그룹들이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과 그 마음의 표현이 부족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소속되지 않은 그룹에게 좀 더 많은 관심과 감사를 표현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자신이 속해 있지 않는 나머지 두 그룹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다가갈 때, 우리 본당 공동체의 모습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될 것으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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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부님/부제님/수녀님으로 구성되는 사목자
    2. 본당공동체를 신앙적으로 이끌어 가는 이분들의 영성, 노고, 모범, 희생에 우리 본당 공동체가 의지하고 있기에, 평신도와 봉사자들로부터 마땅히 사랑과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바탕에 평신도와 봉사자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자리해야 하고, 때때로 이 감사의 마음을 상대에게 표현해 주어야 합니다.

    3. 사목위원을 포함한 제 봉사자
    4. 자신들의 고유 봉사직무에 더하여, 보다 가까이에서 사목자의 사목을 보좌하는 역할을 함은 물론 때로는 사목자에게는 충심 어린 조언을, 평신도에게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탕에 사목자와 평신도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자리해야 하고 때때로 이 감사의 마음을 상대에게 표현해 주어야 합니다.

    5.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평신도
    6. 어느 단체이든 유지발전을 위하여는 각 구성원들의 최소한의 참여와 역할을 필요로 합니다. 주일미사에 손님으로 참례하는 것으로써 공동체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고 여기고 있는 평신도가 우리 본당공동체 내에 많이 있다면,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를 받쳐주는 풀 뿌리로서 평신도는 사목자와 봉사자들이 하는 봉사업무에 대하여 건전한 비평을 하면서 아울러, 본당 공동체의 주인으로 참여하려는 자세를 함께 가져야 합니다. 바탕에 사목자와 봉사자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자리해야 하고 때때로 이 감사의 마음을 상대에게 표현해 주어야 합니다.

  2. (말씀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 하나되는 신앙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 교민
    • 주재민
    • 주재원
    • 신교민
    • 모든 구성원의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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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본당 공동체 구성원들은 그룹별로 10~20여년 정도 세대차이가 나면서, 현지정착 배경과 가치관이 다르기에, 동일 사안에 대하여 바라보는 시각과 대응방식에 차이가 커 보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들 모두는 말씀 안에서 서로를 인정하고 또한 조화를 이루어 하나되는 신앙공동체를 지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는 방안의 하나로써, 사목회의 임원 구성은 물론 본당 내 제 봉사 및 신심 단체에 각 구성원들을 고르게 참여시키는 것이 있겠습니다. 아울러 본당 공동체구성원 모두의 2세들에게 공동체 내에서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물리적 정서적 공간을 마련해 줌으로써 그들이 미래의 우리 공동체를 이끌어 나갈 준비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하겠습니다.

  3. 시대 변화에 발 맞추어 새로 태어나는 신앙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 본당 공동체 운영체계 재조명
    • 부임 사목자의 역할 재조명
    • 현지 교구/지구와의 관계 재조명

    우리를 둘러싼 세태가 급변하고 본당 공동체의 구성원 또한 다원화됨에 따라, 이 변화와 다원화를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 운영체계의 필요성이 커져갑니다. 아울러 본국으로부터 본당 공동체에 부임하는 사목자를 향한 기대는 높아지고 또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거룩한 제사장으로, 자상하고 따뜻한 사목자로, 능력 있는 행정가이자 경영자로, 감동을 주는 강론자로, 영성이 충만한 수도자로, 위안을 주는 친구이자 위로자로, 전인격자로! 하지만, 1) 부임하시는 사목자 또한 유한한 인간이기에 이 모든 기대를 다 충족시킬 수 없으며, 2) 본국과 현지의 물리적 환경 차이와 시대변화로 인하여 사목자와 공동체 구성원 사이의 정서적 간격은 커져 갈 개연성이 높기 때문에 본당 내에서 사목사안 별로 구성원 간 이견이 노출될 때가 많은 현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임 사목자의 역할을 재 조명해서 조정할 필요성이 커져 갑니다. 또한 현지의 교회체계가 변화하고 있고 교구와 지구로부터의 요청에 부응해야 할 사항이 많아진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러한 변화와 요청에 맞추어 우리 본당의 운영체계가 바뀌어야 함은 물론 본당 구성원 또한 그 변화에 발 맞추고 적응해 가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담기 위해서는 본당의 구성원 모두가 손님이 아닌 주인의 자세로 임하면서 저마다 하나씩 일을 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이 우선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공동체가 변화해 나가는 과정에는, 서로간 생각이나 의견의 차이로 인하여 분열과 대립으로 불타오르는 이전의 과정이 있을 수 있겠으나, 말씀 안에서 서로에게 감사하고 조화를 이루어 하나되려는 자세로 변화하는 시대에 발 맞추어 나아간다면 우리 프랑크푸르트 한인 천주교회는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신앙 공동체가 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공동체는 미래의 사목자들이 흔쾌한 마음을 가지고 부임해 오고 싶어하는 신앙공동체가 될 뿐만 아니라, 내부의 구성원 모두에게는 물론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도 매력적인 신앙 공동체로 발전되어 나갈 것으로 믿습니다. 아멘!

 

설립 50주년 희년의 다짐

일어나 아버지께로!

1970년 공동체 설립부터 반세기 동안 공동체에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50일!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체험하고 사도로 변화되어 용감하게 복음 전파에 나섭니다. 50년! 우리 또한 성령의 도우심에 의탁하며,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세상 안에 복음을 전하고자 ‘공동체 희년의 다짐을 선포합니다. 일어나 아버지께로!


○ 희년의 다짐 – 뜻이 있는 곳에 길을! 기쁘게 복음을 전하는 신앙공동체!

  • (성부) 성경 말씀을 통해 공동체에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고,
  • (성자) 그리스도 성체 성혈의 신비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일치하여,
  • (성령) 늘 함께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평신도 사도직에 함께 임하는 신앙 공동체

○ 희년의 다짐 선포 원년 (2020-2021년) 실천 사항

  1.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길을 찾고 배우는 공동체 (전례/교육/여성분과 및 신심단체 등)
    • 성경 통독 및 필사 (혹은 신약 구약 일부) 봉헌
    • 주일 및 평일 미사 전후 본당 사목자의(신부님, 부제님, 수녀님) 오프라인 정기 성경 강좌 개설
    •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 기도문 제정 및 기도 봉헌
    • 전 신자 묵주기도 30만단 봉헌

  2. 다양성 안에서 일치하고 사랑하는 공동체 (각 구역 및 사회복지/청소년/선교분과 등),
    • 온라인 신앙강좌 시청, 거룩한 독서 모임 활성화
    • 화상채팅 활용, 소공동체(구역과 반) 모임 및 신심단체 모임 연속성 유지
    • 중고등부 모임 개설 및 신심활동 지원
    • 구역별 새 전입자 대상 현지 생활 적응 지원그룹 운영

  3. 사도로서의 소명의식을 지닌 공동체 (교육/홍보분과 등)
    • 피정(성인들, 사도들의 삶 조명)
    • 성지순례
    • 본당설립 50주년 기념 책자 발간

  4. 기쁜 마음으로 선교하는 공동체 (선교/사회복지/홍보분과 등)
    • 바이러스 감염 우려 등으로 미사 참석하지 않는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관심
    • 쉬는 교우, 냉담자, 환자 및 어려운 이웃 대상 공동체 내부 선교방안 설계
    • 지역사회(주재원과 이민자) 대상 다양한 선교방안 마련
    • 개인 및 단체별 선교활동 계획 수립, 활동 및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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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 한인천주교회 설립 50주년을 기념하여 이 페이지에서 보시는 내용을 담은 책자를 발간하였습니다. 아래 버튼을 눌러 PDF 책자를 보시거나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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